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악한 세력들은 항상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부분에서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을 만들어 낸다. 느헤미야 6장에 나타난 그들의 공격 전략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말씀을 통해 살펴보자.
1. 그들의 전략 : 유인(call over)
예루살렘의 성벽 건축은 거의 다 완공이 되었다. 문짝만 달면 끝이다. 이 소식을 들은 산발랏과 게셈이 느헤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는 편지를 보낸다. 그를 불러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느헤미야를 죽이려는 것이다.
사탄은 항상 자기들이 유리한 곳으로 우리를 불러낸다. 자기의 영역에서 싸워야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우리가 서 있는 이곳, 나의 영역이 성령으로 무장이 되어 있으면 그들은 결코 함부로 치고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 두 가지 실패할 여지를 갖고 있다. 첫째로는, 내 영역의 부재이다. 하나님과 나와 깊이 있는 만남을 갖는 신앙의 개인 영역이 없다. 교회를 오래 다녀서 종교심은 있는데 신앙은 없다. 둘째는, 온전한(!) 영역의 부재이다. 매일 말씀 묵상, 기도, 바른 신앙의 삶을 살고 있기에 스스로 견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뜻밖에 이 때가 가장 위험하다. 내가 영적인 영역을 갖고 있는데 아직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벽한데 문짝이 없다(1절). 그런데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강력한 ‘영적인 문’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10장 7~9절을 보면 예수님이 ‘문’이라고 얘기한다.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그 어떤 것으로 대신 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우리는 항상 나의 가정과 직장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무단히 노력을 한다. 밤에 자지 않고, 칼과 방패를 들고 나의 영역을 지킨다. 하지만, 문이 없다.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는데 삶 속에 예수가 없다.
이것이 요즘 우리 기독교의 현실이다. 모든 교회 마다 설교도 있고, 찬양도 있고, 부부 세미나, 자녀 교육 세미나 등 신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그곳에 그리스도가 없다. 요즘 현대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자꾸 다른 것들이 치고 들어온다. 항상 우리는 우리 가운데 신앙의 영웅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슈바이처 박사, 테레사 수녀가 우리의 삶에 깊이 들어와 있다. 그래서 그분들을 본 받는 삶이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야기이다.
느헤미야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완벽하더라도 문짝을 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사라고 선포하고 그들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믿음의 성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문’이라는 것이다. 이 문이 견고할 때에 우리는 영적 전쟁에 승리를 할 것이다.
2. 그들의 전략 : 루머(rumor)
신앙의 공동체가 무너지는데 가장 큰 요인은 일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부정적인 말이다. 특별히 리더가 루머로 인한 공격을 당하면 공동체에 큰 어려움이 생긴다. 느헤미야 역시 루머에 의한 공격을 당한다. 적들이 느헤미야에게 오노 평지에서 보자는 편지를 네 번을 보냈는데 거절을 당한다. 그러자 다섯 번째 편지에는 ‘느헤미야가 반역을 일으켜 왕이 되려 한다’는 내용을 담아 봉하지 않은 채로 보낸다. 왜 봉하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읽게 하여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는 육체적인 공격보다 없는 말을 지어서 퍼뜨리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 루머가 퍼질 때에 느헤미야가 어떻게 처신했는가? 그는 긴 얘기를 하지 않았다. 만나서 따져 보자 얘기하거나 시시비비 가리기 위해서 뛰지 않았다. 그냥 간단하게 처리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신이 지어낸 이야기이다(8절)” 하고 끝낸다. 우리를 공격하는 말들이 있을 때는 감정적으로 대처해서는 안된다. ‘사실이 아니다’하고 진실(fact)를 단호히 얘기한다. 그러나 길게 얘기하면 안 된다. 억울하더라도 참고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진리를 드러내게 해 주시고,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이다.
3. 대적 방법 : 말씀
일반적으로 어려운 일이 닥치면 당연히 도움을 줄 사람을 찾게 된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마음이 고통과 번민이 있을 때에 좋은 신앙의 동료가 있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다. 느헤미야도 마음에 번민이 있어서 친구 스마야를 찾아 간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의 전략에 말리게 된 일이 되어 버렸다. 친구 스마야가 이미 적의 꼬임에 넘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친구 스마야가 느헤미야를 위해 주는 척하며 조언하기를 하나님의 성소에 피신해 있으라고 얘기한다. 이 말은 굉장히 고마운 얘기 같으나 고도의 술수이다. 왜냐하면, 성소나 지성소에는 제사장 외에는 다른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죽임을 당한다. 즉, 합법적으로 느헤미야를 죽이려는 그들의 계략이다. 항상 마지막 유혹과 시험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온다. 나를 위하는 척하면서 하는 말이 거짓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누가 나에게 해 주는 조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사탄의 소리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 충고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봤을 때에 충돌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구분할 수 있다. 아무리 그것이 내게 큰 유익과 이득을 볼 수 있는 얘기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하면 아니다.
이것에 양보가 있으면 안 된다. 과감히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 그 아픈 마음을 토해 내야 한다. 하나님 잊지 말아달라고,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견디고 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내가 내 편의와 안위보다 하나님을 택하였음을 잊지 말아달라고... 그 분께 매 달려야 한다. 그 때에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위로를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하여 무너진 삶의 곳곳을 재건할 힘이 그곳에서 시작이 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사탄의 유혹에 가장 잘 넘어 갈 때가 언제인가?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은 무엇인가?
3. 예수님 외에 나의 신앙의 문으로 지키고 살아 온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는가? 내 신앙의 문은 진정으로 예수님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솔직한 마음으로 나누어 보라
4. 말로 인한 공격과 오해를 받을 때에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떻게 그것을 이기었는가?
5. 가장 믿었던 친구 혹은 지인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한 경험은 무엇이었는가?
6. 세상의 사조나 상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선택하여 좋은 결과를 낸 경험이 있었다면 나누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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