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그 부흥의 이유는 무엇인가?
1. 교회 공동체의 양적 부흥의 이유
1) 기사와 표적 : 예수님이 그리스도(구원자)라는 것을 대표적으로 잘 드러내는 증거 가운데 하나는 믿는 자에게 일어나는 ‘기사와 표적’이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의 목적은 내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천국의 약속은 신자만이 가진 특권이다.
하지만 이 말이 곧 기독교인이라면 현세의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당연히 여기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현세의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바람을 가져야 하고 이를 위하여 마땅히 기도하여야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만날 수 있다.
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본인이 메시야임을 증거를 통해서 설명하셨다. 그것은 자신을 통하여 병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말을 하며 그 일을 복음 전파와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셨다(마13:5). 즉, 복음은 내세에만 국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의 문제도 해결하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2) 백성들로부터의 칭찬 : 요즘은 초대교회 시대와 달리 한국이든, 미국이든 교회의 부흥을 찾아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왜 그러한가. 당시는 불신자가 신자에게 영적, 물질적 덕을 봤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크리스천이 그들에게 삶의 모범과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반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삶의 근본적인 방향과 노선이 성경이 제시하는 방향과 전혀 다르다. 신자라 칭하는 자들이 복음과 상관없는 나대로의 신앙의 방법을 고수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의 방향을 찾으며 고심하기보다 내가 정해 놓은 삶의 노선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인생이기 보다 하나님이 내 인생 길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에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이 현재 신자의 모습이다.
초대교회에는 많은 병자들이 치료되는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이 칭찬을 받았던 이유는 그러한 세상적인 해결에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것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삶의 본질적인 감사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추구와 세상의 추구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이어지는 내용이다. 베드로는 40년 된 병자를 일으킨 대가로 감옥에 갇혔다. 착한 일을 했는데 그것에 근거하여 세상적인 복을 받지 않았다.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남들의 병은 많이 치료했으나 본인이 갖고 있는 고질적인 병은 치료하지 못했다. 도리어 굳이 기적을 동원해서 병을 고치려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궁극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원리와 본질을 바로 이해할 때에 이 땅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 속에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2. 표적과 기사란?
영어 성경을 보면 기사는 Wonder로 말 그대로 ‘놀라움’이다. 반면에 표적은 Sign이다. 표지, 징후, 조짐이라는 뜻으로 나중에 무언가가 나타날 것을 미리 보여주는 수단이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기적들은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인데, 그것은 많은 경우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과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포커스가 있다.
5장에 사도들이 투옥이 된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옥문을 열어 끌어내신다.
이것은 분명한 표적이다. 즉,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싸인이다. 옥문이 열린 이유는 무엇인가. 천사가 옥문에서 그들을 끌어 낸 후에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20절)고 지시한다. 그러니까 이 표적은 생명의 말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목적으로 보여준 싸인인 것이다.
‘생명의 말씀’이 무엇인가.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의 살리신 일’(30절)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의 허물과 실수로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여기서의 ‘너희’란 종교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의미한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생활을 통해서는 구원이 없다고 선포한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가지의 고백이 마음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예수를 나의 ‘임금’과 ‘구주’로 믿는 것이다. 그분을 나의 주님(Lord)과 구원자(Savior)로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있다. 이것은 내가 그분이 ‘명한 것을 잘 지키는 것’ 이전에 그분의 명령에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고백이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 고백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과 구원자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는 자에게서 만이 따라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전에 그 분은 나의 임금이기에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마음의 고백이 참 믿음의 반응이다.
3. 신자의 기쁨
신자의 기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내 삶에 표적과 기사로 기준 되지 않는다. 오늘 본문에도 사도들이 옥문이 열렸을 때에 기뻐했다는 말이 없다. 그들이 기뻐했을 때는 오히려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당하고, 능욕 받았을 때에 기뻐했다(41절).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을 원형 경기장에 몰아 놓고 사자를 풀어 놓았다. 그런데 다니엘 시대에 나타났던 것과 같은 사자가 양같이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독교인 모두가 다 사자밥이 되어 순교를 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죽음이 순간에도 평안을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자의 기쁨이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다. 이런 평안은 예수님을 나의 왕, 나의 주님으로 모실 때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신자는 모든 상황 속에서, 그 어떤 아픔과 고난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안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 그리고 구원자로 믿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그 때 내게 일어난 기적은?
3. 요즘 시대의 기독교인들의 장점과 약점을 말해 보라.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4. 내가 요즘에 어려운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는 가장 기쁜 일은 무엇인가.
5. 내가 사도들의 입장이라면 옥문이 열린 후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 같은가. 그 모습을 상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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