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의 다락방에서 남겨진 제자들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신비로운 방법이 아니었다. 이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성경 말씀이었다. 그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잡는 길잡이가 된 것이 ‘말씀의 성취’였음을 시편의 말씀을 통하여 깨달았다.(20절) 그 후 그들이 내린 결정은 이제 가룟 유다의 죽음으로 인한 사도의 빈자리를 제비 뽑아 채우는 것이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이다.
1. 본문에 나타난 의문점 3가지
1) 가룟 유다의 죽음 장면 : 마태복음에 보면 가룟 유다는 목매달아 죽었다고 되어 있다(마27:5).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곤두박질해서 배가 터쳐 창자가 흘러 나와 죽었다(18절)고 한다. 어떻게 된 것인가. 그것은 누가가 사도행전을 쓰면서 이미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을 참조해서 보충 설명한 것이다. 즉, 가룟 유다가 목매달아 죽은 곳이 절벽이었는데, 그를 매단 줄이 어떤 이유로 끊어져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배가 터지게 되었던 것이다.
2) 밭의 주인은 누구인가 : 사도행전에는 가룟 유다가 밭을 샀다고 써 있다(18절)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가룟 유다가 은 30을 대제사장에게 던졌는데 그들이 그 돈으로 밭을 산 것으로 되어있다(마27:6,7). 이 차이는 대제사장들이 그 밭을 가룟 유다의 이름으로 산 것으로 생각된다. 마태는 당시 벌어졌던 상황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누가는 결론적으로 ‘그 밭의 주인은 유다이다’라고 간단히 정리한 것이다.
3) 가룟 유다의 배교 : 가룟 유다가 성경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팔았던 것이라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지옥에 가기로 결정이 된 것이었는가. 혹자는 가룟 유다가 한 행동이 성령을 모독한 죄에 해당하기에 용서 받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결론적인 얘기이다. 꼭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논리를 적용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리려했던 베드로 역시 같은 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정답은 ‘모른다’이다. 이것은 우리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신앙은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 하나님이 하시는 일 중에 인간이 해석하고 정의 내릴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으로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신자의 마땅한 길이요. 도리이다.
2. 선거 결과
이 선거에는 약 120명이 참여했다. 공천의 자격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예수님이 침례 요한의 침례를 받을 때부터 승천 때까지의 일을 경험한 사람. 다른 하나는 제자들과 함께 다녔던 사람이다. 이 두 조건에 다 해당하는 사람은 두 사람, 요셉과 맛디아였다. 성경은 여러 가지 증거로 모인 사람들은 요셉이 당첨되기를 원했었음을 말한다.(e.g: 요셉의 소개가 더 많음) 하지만, 당첨자는 맛디아였다.
사람들이 몹시도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결과에 순종하여 맛디아를 임명한다. 왜 이렇게 했는가.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이루어진 일에 대하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각과는 다른 차원의 일을 계획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맛디아의 당첨 이유를 보면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3. 맛디아 당첨 이유
우리는 맛디아는 인간의 생각과 다르게 하나님이 뽑은 사람이니까 기대 이상으로 사역을 훌륭하게 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이 일이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 아이러니 하게도 맛디아는 이 장면 이후로 사도행전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곳에서도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요셉이 되었으면 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그 역시 이 후로는 그의 이름을 볼 수 없다. 그럼, 맛디아를 뽑은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배려 : 당시 유대인들은 12라는 숫자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 12는 완전수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도 12지파,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킨 후에 남은 광주리도 12개, 다락방에 모인 숫자도 12의 10배인 120명 등 12라는 숫자는 꼭 채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야 후에 회복될 이스라엘에서 12지파를 12사도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의 고정관념이다. 사역 초반부터 이것을 깨버리면 이들이 불안해 할 것을 감안하신 하나님의 배려이다.
2) 삶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기 위함 : 그들은 사도 중 하나가 빠지니 불안한 마음으로 한 사람을 더 뽑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도가 한 사람 더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일에는 크게 지장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6장에 가면 오히려 일곱 ‘집사’를 뽑아서 행정을 맡기고, 12장에 가면 야고보 사도가 순교했을 때는 더 이상 사도를 채워 넣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은 사람의 능력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순종하는 자만 있으면 그를 통해 하나님이 손수 일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나를 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일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직접 일 하신다’라는 믿음으로 순종하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갖는 큰 착각이 있다. 성령이 나에게 오시면 내가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 성령이 나에게 임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일을 통해서 나를 완성하기 위해서이다. 내 속을 바꾸기 위해서이다. 맛디아에게 임한 성령으로 그가 큰 일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최고 목표는 일이 아니라 신자,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하시는 일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얘기한다.(롬8:26) 만일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강력해진다면 그분이 탄식할 필요가 왜 있겠는가. 성령이 오면 우리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연약함을 끌어안고 같이 가는 것이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더 이상 나를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탄식과 한숨 속에서도 배짱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돈이 없어도, 병들고 연약해도 그것이 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기에 결국에는 우리의 복됨을 위해서 그 길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참 복음에 거하는 신앙이다. 우리는 이 일에 초대된 자들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평소에 가룟 유다에 가진 의문들을 나누어 보라. 이를 통하여 느끼거나 얻은 교훈이 있는가.
3. 기대했던 일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일이 있었는가. 그것을 통하여 배운 것은 무엇인가.
4. 나한테는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잘 되거나 혹은 안 된다면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5. 성령은 나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성령이 나의 부족한 부분 중에 꼭 바꿔주셨으면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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