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로 인하여 3,000명이 회개하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사건을 말하고 있다. 그의 설교의 내용과 핵심 사항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본다.
1. 논리가 아닌 선포
베드로의 설교는 설교학적인 측면으로 보면 낙제점이다. 논리력, 설득력, 감화력 다 떨어진다. 오히려 집사였던 스데반의 설교(행7장)가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는 3천명이 회개를 했는데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 중에 회개한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오히려 청중들은 스데반을 돌로 쳤다.
사실 베드로가 처음 설교를 시작했을 때는 청중의 반응은 감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 술에 취했다’라며 조롱했다. 이 얘기를 들은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 사건이 요엘서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냥 선포하며 설교를 시작했다.
베드로의 설교 메시지는 단순하다.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논리도 없고, 감동도 없다.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얘기와 그의 기적에 대한 소개도 없다. 그저 단순히 성경에 입각한 사실만을 선포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첫째는 그것은 베드로가 직접 경험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책 속의 예수가 아니라 자신이 겪고 만난 예수를 전했다. 그가 경험한 예수는 분명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거침없이 전할 수 있었다.
그렇다. 만일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힘이 없다면 먼저 나를 돌아 봐야 한다. 정말 내가 예수를 개인적인 구주로 만났는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그 질문에 확신이 있는 대답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전하는 복음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게 될 것이다.
둘째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내가 경험한 어떤 진리를 전했을 때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감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감동의 내용이 청중의 신앙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것은 쉽지 않다. 베드로의 그 단순한 설교로 3,000명이 회개를 했다는 것은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의 개입’이다. 회심은 기적을 경험하거나 권능을 받았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가능하다.
베드로와 스데반의 설교의 스타일은 많이 달랐다. 베드로의 설교는 단순했지만, 스데반의 설교는 논리적으로, 성경 신학적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설교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말씀을 들은 이들 모두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다. 그것은 성령의 강한 역사다.
차이점도 있다. 그것은 베드로의 설교는 3,000명이 회개를 했지만, 스데반의 설교는 한 사람도 회개하는 자가 없었다. 오히려 분노하며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인간적으로 보면 실패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을 하신다. 스데반을 죽이는 그 현장에 서 있던 한 사람을 변화시키셨다.
그가 누구인가. 사도행전의 대부분의 이야기를 채우고 신약 성경의 약 절반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다. 이것이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때로는 한편의 설교로 3,000명을 회개시키기도 하시지만 실패한 것 같은 한 편의 설교로 기독교의 새 역사를 써 내려간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하신다. 그것이 우리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다.
2. 죄사함의 근거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를 한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38절) 즉, 죄 사함의 조건이 ‘회개’이다. 그러나 원어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 영어 성경으로는 “Repent, ...for the remission of sins”이며 여기서 for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εἰς)”이다.
사실 이 단어는 ‘~위하여’라는 뜻이 아니다. 주로 into(~안으로)라고 번역이 된 단어이다. 그런데 이 본문을 그렇게 번역하면 ‘죄 사함 안으로 회개하라’라는 어색한 번역이 된다. 그렇다면 이 단어가 쓰인 다른 용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하여, ~ 때문에’이다. (e.g: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의 이유. 마12:41)
이 해석을 그대로 오늘의 본문에 접목하면 전혀 다른 뜻이 된다. “Repent, ...for the remission of sins”라는 말은 ‘죄 사함을 위하여 회개하라’가 아니라 ‘죄 사함으로 인하여’ 혹은 ‘죄 사함 때문에 회개하라’는 뜻이 된다. 곧,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이기에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할 때에 우리에게서 보여 지는 어떤 행위를 근거로 해서 구원한 것이 아니다.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대속의 죽음으로 인하여 일방적으로 구원해 내신 것이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이 주권이요. 우리를 향하신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이다. 죽은 시체에게 ‘일어나서 나에게 오면 너를 살려 줄게’라고 요구할 수 없다. 죄로 인해 죽은 우리에게, 전혀 반응할 수 없는 우리에게 ‘회개라는 것’으로 반응하면 너를 살려 주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 이유로 먼저 우리를 살리시고, 그 뒤에 ‘나에게 오라’고 회개를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회개는 구원 얻은 자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회개는 우리의 감정적인 반응에 있지 않다. 주님께 돌아오는 결단에 있다. 철저한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이다. 울고 가슴을 치는 것은 애통이지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가던 길을 돌이켜 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이 사실이 정리가 되면 베드로의 설교와 스데반의 설교가 이해가 된다. 이 사건은 ‘몇 명이 회심을 했다’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다 동원하여 우리를 구원하고 계심을 봐야 한다. 그 사실을 알면 절로 감탄을 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속에서 벌어지는 어려움 속에서 실컷 화내고, 흥분하고 낙심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웃을 수 있는 자가 신자이다.
매일 우리를 향하여 변함없이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다함없는 은혜를 우리의 삶 속에 담아내자. 그 감격을 단순한 병 고침의 기적과 해결되는 하루의 고민으로 바꾸지 말자. 그것을 아는 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향기가 흐르게 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베드로가 왜 죽음을 무릅쓰고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베드로였다면 그 현장 속 에서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3. 나에게 참 복음을 깨닫게 해 준, 알게 해 준 기억하는 설교가 있는가. 그것을 나누어 보라
4. 내가 청중의 입장이었다면 베드로의 설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5.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오는 회개를 한 기억이 있는가. 그 회개를 통하여 어떤 결단을 하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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