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교회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 교회의 원형이다. 이들의 교회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1.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제사’했지만, 지금의 우리는 ‘예배’한다. 이 둘 사이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제사(sacrifice)의 뜻은 ‘제물, 혹은 희생’이다. 즉, 하나님을 만날 때에는 무언가의 희생이 필요함을 말한다. 신에게 희생하고 바치고 드리는 것이 강조된 개념이다. 반면에 예배(worship, service)는 하나님을 향한 봉사와 섬김이다. 제사 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럼,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봉사는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오늘 본문의 모습을 통해서 예배의 5가지 요소를 볼 수 있다.
1) 사도의 가르침(설교)
2) 교제
3) 떽을 뗌(성만찬)
4) 기도
5) 찬송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는 하나님과의 만님이 물리적인 장로를 의미하는 ‘성전’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성령 강림 사건 이후 하나님의 처소에 대한 개념이 바뀌었다. 내가 곧 성령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기 때문에 내가 현재 거하는 그곳이 예배의 처소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민과 갈등이 있다. 하나님께서 내가 있는 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면 굳이 뭐하러 ‘물리적인 장소인 예배당에 갈 필요가 있는가’라는 점이다. 설교는 인터넷으로 듣고, 기도와 찬송은 집에서하고, 헌금은 온라인으로 보내면 되면 되는 것 아닌가하는 고민이 든다.
결론부터 말을 하자면, ‘집에서 예배를 드려도 된다’. 집에서 말씀듣고 기도하고 드리는 찬양을 하나님은 예배로 받으신다. 그러나 신자는 적어도 한 주에 한번은 함께 예배당에서 모여 예배하고 한 공동체를 이루는 신자의 삶을 살아 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앙생활’과 ‘신앙의 성숙’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생활이란 나와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 속에 누리는 풍요로운 영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 강림 이후의 신앙생활은 ‘내 이웃과의 교제’가 상당히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영성은 대부분 ‘도’를 닦는 의미의 고립이다. 사람이 없는 산 속이나, 동굴로 들어가서 오랜 기간 동안에 수련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종교수양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사람 사이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지지고 볶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만의 교제를 신앙 생활이라 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진 축복과 사랑을 내 둘레의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 속에서 우리 인간의 한계를 발견한다. 이를 통하여 머리가 아닌 몸으로 하나님 만이 믿고 의지할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제의 자리를 피하면 안 된다. 우리는 공동체를 통하여 위로도 받지만 상처도 받는다. 이 과정 가운데 우리는 영적인 성숙을 이루게 된다. 그렇기에 이것을 즐길 수는 없더라도 피하거나 도망가면 안 된다.
그런 의미로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은 ‘고독’일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외로울 수는 있으나 그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분리나 격리하는 것은 크리스찬의 삶이 아니다. 이를 보여 주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성도의 교제를 강조했다.(교제, 떡을 뗌, 모이기를 힘씀, 음식을 먹음...)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감은 두 가지를 함께 함을 의미한다. 성도의 교제가 있는 ‘예배당에서의 모임’과 각자의 처소에서 몇몇의 ‘가족 혹은 지인들과 함께 모이는 소그룹’이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성도의 교제가 살아나야 한다.
2. 쎌 모임의 구체적인 모습
헬라어에는 42절의 ‘교제’라는 말 앞에 ‘그’라는 정관사가 있다. 즉, 일반적인 단순한 교제가 아니라 앞에 언급한 ‘성령이 함께한 교제’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세상의 교제와는 달라야 한다. 나누는 대화와 내용 속에서 그리스도의 위로와 섬김이 어우러지는 교제이어야 한다. 42절에 나오는 ‘떡을 뗀다’라는 표현도 식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만찬’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이다.
이 말을 우리 교회의 쎌 교회와 적용을 해 보면, 쎌 교회 안에 이루어지는 교제는 ‘성만찬’의 의미가 부여된 모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만찬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적인 교제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러니까 쎌 교회 안의 교제는 어떤 구체적인 모양과 형식은 없더라도 그 안에서 반드시 살아나야 하는 정신(spirit)이 있다.
그것은 우리는 주께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묶어주신 한 가족임이 세워져야 한다. 이것이 쎌 교회 안의 성도의 교제 속에서 반드시 살아나야 하는 영성이다. 신앙의 성숙은 주일날 예배당만 밟고 가는 것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나를 돌아 보고, 나눌 수 있는 영적인 가족들을 만들어가고 섬겨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영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다.
3. 예배의 결과
최근 한국에서 교회들의 문제가 많이 대두가 되니까 슬금슬금 트랜드처럼 번지고 있는 교회의 유형이 있다. 그것은 목회자 없이 평신도들끼리 집에서 예배하는 모임이다. 이런 교회들 속에는 위험한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초대교회의 한 모습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중의 어떤 교회들은 초대 교회로 돌아간다는 명분을 앞세워 오늘 본문처럼 자기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고(44,45절) 공동체 생활을 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45절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45절에 등장하는 동사 3가지(팔다, 나누다. 가지다)는 모두 다 ‘미완료 시제’이다.
그러니까 한 번에 다 팔고 바쳐서 무소유자가 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의 필요가 생길 때마다 자기의 것을 틈틈이 팔아서 도와준 것이다. 제 것을 팔았다고 해서 꼭 다 바쳐야 공동체 일원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모두가 전 재산을 팔아서 공유하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 운동에 동참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이제 금방이라도 오실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종말이 곧 도래할 줄 알았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이 운동에 동참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이 모습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 그들은 종말론적인 신앙의 관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세신앙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내세신앙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말에는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가치가 끝이 나고 새로운 가치가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우리의 삶이 그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바른 교회란, 현세의 가치를 추구하는 교회가 아니다. 내게 주어진 어떠한 형편과 상황에도 만족하여 웃을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 자랑이 되는 교회이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다. 그럴 때에 온 백성에게 칭송 받고 구원 받은 백성이 더해지는 교회가 될 것이다.(48절)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나는 제사하는가. 예배하는가. 말씀을 듣고 깨달은 차이를 서로 말해보고 ‘나는 OO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어인가?
3. 예배당에서 하는 예배의 장점과 단점을 서로 나누어 보라. 이 예배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은?
4. 내가 정의하는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신자는 예수를 믿은 후에 반드시 가져야 하는 영성은 무엇인가?
5. 공동체 영성과 개인의 영성을 조화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 나누어 보라
6. 내가 가진 내세신앙, 종말론적 신앙을 정리해보고 ‘나는 그것에 맞게 살고 있는가’를 나누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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