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 속에 나온 교훈들을 살펴본다.
1. 기적의 목적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시간(제 구시)에 맞추어 성전에 올라가던 중 마침 ‘미문’ 앞에 앉아서 구걸을 하던 앉은뱅이를 발견한다. 미문(美門)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통하던 11개의 문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문이다. 이 문 앞에 앉아있던 걸인은 40세의 나이라고 하니,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거의 노년의 나이라 할 수 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이기에 이 자는 거의 평생을 비참한 생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이 불쌍한 노인을 베드로가 말씀 한 마디로 고쳤다. 그렇기에 이 본문은 병환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나 가족에게 상당히 격려가 되고 희망이 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의 목적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
병 치료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적하신 곳으로 끌고 가기 위하여 사용된 도구이다. 우리에게 기적은 궁극의 목적이 아니다. 더 가야할 길이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 말하는 ‘기적의 목적’은 무엇인가.
다시 본문으로 가보자. 여기에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 걸인을 미문 앞에 놓았다. 상식적으로 구걸을 하기에 좋은 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그렇다면 성전에 놓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할 터인데 왜 미문에 놓았을까.
그것은 율법에 의하면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레21장) 그러니까 이 앉은뱅이 노인은 평생 단 한 번도 성전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를 베드로가 고쳤다. 그 때, 그 노인이 고침을 받자마자 제일 먼저 한 행동이 무엇인가. 성전에 들어갔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렇다. 치유의 기적은 그를 걷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성전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로 하여금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예배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적의 궁극적인 내용, 목표, 그 의미는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조차 전혀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 보자. 그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다. 그 치유가 그의 남은 평생의 행복을 보장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쩌면 그에게는 더 어려운 삶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구걸밖에 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건강해졌지만 노인을 일꾼으로 쓸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기에 육신이 나음을 입었다는 사실 하나로는 그의 삶이 축복된 인생으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없다. 앞으로 남은 인생의 어려움이 더 깊어 질 수 있는 개연성이 농후하다.
그에게는 억압된 인생의 ‘탈출’ 보다, 그 이후의 새로운 삶이 보장된 ‘구원’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기적은 그 오랜 동안 그를 절망케 하고 묶어둔 질병에서의 탈출이 아니다. 그로 하여금 이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 안에 들어가게 하는 구원이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를 일으킨 후에 그를 잡고 성전으로 같이 들어갔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혹은 건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다. 우리를 그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남은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해방의 삶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삶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다.
성경에 나온 대부분의 기적은 단순히 그 벌어진 일로 그치지 않는다. 많은 기적들의 공통점은 그 결과로 주님께 돌아오거나, 복음을 들어 자유함을 얻는 것으로 다 연결이 되어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를 믿어서 ‘나음을 입었다. 명예를 얻었다. 부유함을 얻었다’가 아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가’가 중요하다. 참된 기적은 내가 예수를 믿어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기적이다.
2. 기적의 방법
많은 경우에 이 앉은뱅이 걸인이 걸을 수 있었던 이유를 그에게서 찾는다. 그것은 그가 병고침에 대한 기대를 갖고 베드로를 바라 봤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응답으로 병이 나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걸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3절~5절에 있는 한국말의 ‘보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단어 4개가 헬라어로는 많이 다른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3절 ‘보고(see, 에이도)’는 눈에 그냥 들어온 것, 4절 ‘주목하다(gaze, 아테니조)’는 의미 있게 보는 것, ‘보라(look, 블레포)’는 주목하다. 5절 ‘바라보거늘(gave attention, 에페코)’은 집중해서 보다의 뜻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앉은뱅이가 처음에 베드로와 요한을 본 것은 우리가 생각한대로 ‘병고침을 기대’하고 바라 본 것이 아니다. 그냥 단순히 ‘구걸’을 위해서 쳐다봤을(see) 뿐이다. 이렇게 별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는 그를 의미있게 쳐다 본 것은 오히려 베드로와 요한이다. 처음부터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봤다(gaze).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전하며 그를 고쳤다.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자에게 손을 내밀었기 때문에 그가 나를 붙잡은 것이 아니다. 그가 먼저 나를 응시한 것이다. 그리고 찾아와서 내 손을 붙들고 일으킨 사건, 나를 구원해 내신 사건. 그것이 바로 십자가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종종 아무 생각 없이 있는 병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그들을 치료한 사례가 많이 나온다(요5장, 9장)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이다. 구원은 내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내 행위를 조건 삼아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또한 구원은 육신의 질병과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의 육신의 문제가 해결이 되면 반드시 또 다른 문제가 등장을 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구원은 가장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이다. 현재 당면한 어려움에 대한 해결이 아니라 모든 인생들이 당면하고 있는 ‘영혼 구원’이라는 부분에 대한 해결이다. 평생 성전에 들어가보지 못했던 앉은뱅이가, 이로 인해 자신은 저주 받은 인생이라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그가, 이제는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고, 예배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이요. 그가 갖게 된 권세이다.
현실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에게는 당장의 문제 해결이 큰 과제임이 분명하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라 반드시 이에 대한 응답을 주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그 문제를 넘어 존재한다. 그것은 내가 이제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감격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강력한 보혈의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기쁨과 환호가 우리의 인생을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사랑의 무게를 바로 이해하는 자가 참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신자의 인생이 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왔는가. 그저 단순한 ‘앎’의 관계를 떠나 ‘인격적 교제’를 한 계기는 무엇인가.
3. 자신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기적을 보면서도 우연이라 여기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를 보는가. 그에게 어떻게 복음을 설명할 것인가.
4.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쳐다보고 다가가 일어서라고 말할 수 있었던 용기는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일까. 나는 어떠한가
5. ‘쇼생크 탈출’ 영화를 본 사람은 왜 그 영화가 명화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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