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의 저자는 1~16장까지는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인 사사들의 영적 무지함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 17~21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에 대하여 집중해서 이야기 한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그렇다면, 구약 시대는 어떠한가? 구약 시대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율법을 준수함’으로 받지 않는다. 신약 시대에는 이미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구약 시대에는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구원을 받는다. 그렇다면, 구약에는 예수님이 어디에 나타나 있는가? 그것은 ‘모형’ 혹은 ‘그림자’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구약의 대표적인 예수님의 모형은 ‘어린양, 유월절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 노아의 방주’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모형이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가 계속적으로 선포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시기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사들이다. 죄악으로 고통 받는 이스라엘을 이방인에게서 구원하는 사사들이 그의 모형이다.
그럼,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지금까지 살펴 본 사사들은 제대로 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모두 다 도덕적으로 형편없는 사람들이었고 마치 하나님 하고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는 모형이라는 것은, 그의 인격과 삶의 디테일한 부분이 예수를 닮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구속사적인 시각’이다. 구약 성경에 나온 인물, 사건, 사물 등등... 이 모든 것이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것은 ‘모형’으로써의 충분한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구약을 읽을 때에 삶의 교훈을 우선으로 두면 안된다. 그것이 사람이든, 전체 맥락이든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키 포인트 이다. 그럼, 이제 미가의 이야기 속에 나와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 본다.
1. 하나님의 말씀과의 상관 문제
미가의 집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참으로 종교적이고 신실하다. 하나님을 제사하고, 하나님께 헌물하며,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는 일을 열심히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그들은 이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어기고 있다. (e.g : 돈을 훔침, 신상을 만듬, 아들을 제사장 삼음, 레위인이 떠돌음, 아론의 자손이 아닌데 제사장이 됨, 제사장의 임명권을 미가가 사용, 하나님의 제사장이 드라빔을 섬김 etc...)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상태가 아주 엉망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미가의 집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앙의 모습이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배하고, 기도하고, 헌금을 드린다. 하지만, 어쩌면 이 모든 일이 하나님하고 전혀 상관 없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무서움이 있다.
미가의 어머니가 아들 미가가 자신의 은 1,100을 훔쳐 간 것을 알게 되자 아들로부터 돌려받은 돈을 하나님께 드린다. 은 1,100은 당시 제사장 110년치의 연봉이다. 이 큰 액수를 바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상당히 헌신된 신앙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잘 들여다 보면 그 바친 돈으로 신상을 만들어 아들의 집에 둔다. 손해를 보지 않았다. 또한 다 드리는 것처럼 했지만 신상을 만드는데 200을 쓴다. 결국 900은 도로 자신이 취한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신앙. 미가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집중하기보다 그럴싸한 이유와 명목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 결국에는 자신의 이해타산에 맞는 가를 계산한다. 그렇다. 이 미가의 모습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위함인가 아니면 나의 유익과 번영 때문인가. 스스로 고민하고 자성해야만 한다.
2. 온전한 신앙의 문제
미가의 어머니가 아들의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바친 은으로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만든다.그런데 이 신상(페셀 & 마세카)은 정확히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제작하지 말라고 하신 우상(출20:4)을 의미한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었고, 드라빔은 번영과 행운을 상징하는 가나안의 신이다.
무슨 의미인가. 첫째로, 다른 종교에서 좋다는 것도 같이 섬기는 것이다. 이 사건이 우리의 현실에 빗댈 수 있는 구체적인 예는 성경과 말씀 액자를 부적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액운을 그 자체가 막아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나대로의 신앙의 모습을 갖추고 좋은 것이 좋다고 여기고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 한 분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한분만으로는 안심을 못한다. 크리스천 중에 행여 다른 종교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거나, 또 하라고 하는 것을 안 하면 마음이 불편하다면 아직 하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녀의 결혼을 앞두고 궁합을 보고 싶고, 이사를 앞두고 어느 방향이 복인지를 생각하고, 죽은 사람이 쓰던 물건을 만지는 것이 영적인 의미로 불편하다면 아직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을 의지하며 오늘을 기대하는 자가 신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된 미래에 대한 독려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확신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오늘의 나에게 실재가 될 때에 진정한 삶의 회복과 무너진 신앙의 삶이 재건될 것이다.
결국의 이 ‘미가의 집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예물을 떼먹지 말자는 것도, 하나님과 세상에 양다리 걸치지 말자는 것도 중심 교훈이 아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봐야 한다. 부족한 백성을 향한 끝도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봐야 한다. 형편없는 단지파이지만 주님 재림 때에 가장 첫 분깃을 단 지파에게 돌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봐야 한다.(겔48장)
참된 신앙생활이란 죄짓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것에 대한 감격을 아는 것. 그것을 깨달을 때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유함을 맛 보게 될 것이다. 그 누림이 죄 가운데 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함을 알아갈 때에 경이로운 하나님의 손길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다. 비록 오늘 내게 주어진 처지와 형편이 자랑할 것이 없을 지라도 그 어려운 자리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 그것이 신자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구약 성경에서 내가 뒤 늦게 깨닫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있었는가.
3. 코로나 사태 속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메시지는 무엇인가.
4. 다른 종교에서 금한 것을 나는 아무렇지 않게 행할 수 있는가(e.g: 무당이 “오늘 이사하면 좋지 않다”라고 할 때에 무시하고 갈 수 있는가. 못하면 왜 그런가)
5. 혹시 나도 모르게 내가 가진 물건을 신성시한 무엇이 있었는가. 그것을 어떻게 대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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