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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Soo Yong Lee

사사기 강해Ⅳ: 사사 에훗 삿3:12~25절. 03.29.2020.

사사 옷니엘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모압 왕 에글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쳐서 이스라엘이 모압의 속국이 되게 하셨다. 그로부터 18년 후, 사사 에훗이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80년 동안 이스라엘은 평안을 누렸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교훈 3가지를 살펴보자.

1. 모압의 의미 : 1) 모압의 역할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예인데, 롯의 두 딸이 아버지와 동침하여 낳은 두 아들이 나중에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사사 시대 당시 모압은 이스라엘을 칠 만큼 강국이 아니었다. 자기 형제 암몬과 아말렉 족속과 함께 연합해야 이스라엘을 상대를 할 정도로 약한 나라였다. 더욱이 모압 왕 이름이 ‘에글론’인데 이 말은 ‘뚱땡이’란 뜻이다. 당시 왕은 전쟁에서 진두 지휘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가 ‘비둔한 자’(17절)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모압의 속국이 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전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완전히 죽이라고 명령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명령을 받들어 그들을 진멸한다. 하지만, 완전히 다 죽이지는 않았다. 그저 그들이 이스라엘을 위협하지 못할 정도로만 죽였다. 그리고는 남은 자들이 너무나 변변하지 않기에 ‘그저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조금 남겨 놓았다(수11:22)’고 말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남은 자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후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사사 시대에서는 ‘가사’에서 이스라엘 사사 삼손이 당하고, 다윗 시대에는 ‘가드’에서 골리앗이 나오고, 삼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에게 하나님의 언약궤를 뺏겨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 옆에 두는 수모를 당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이다. 마찬가지로 출애굽 때와 여호수아 시대에 남겨 놓은 아말렉, 모압, 암몬에 의하여 사사 시대 때에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이다.

성경은 항상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을 말한다. 오늘(!) 내가 무엇을 심느냐가 후에 반드시 그 결과로 나타난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무시하는 삶을 산다면 반드시 그 결과는 언제고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그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버리거나 내치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들의 불순종을 그냥 묵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들이 가는 길이 옳지 않다는 것을 항상 그들의 결과로 알게 하신다. 내가 오늘 순종하지 않으면 어느 날 내 인생 속에 모압을 출현시켜서 그 길은 사망의 길이요. 옳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모압의 의미 : 2) 하나님의 개입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모압 백성들을 남겨둔다. 그 죄악의 결과로 인하여 그들은 고통을 당한다. 성경은 이 사건을 죄에 대한 자연 발생적 인과응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벌어진 일이라고 얘기한다.(12절) 세상 순리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 아니라 그들에게 닥친 재양 속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바로 이해하면 우리의 신앙의 길이 쉬워진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모두가 실패하고 실수한다. 그런데 그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을 모조리 내가 다 끝까지(!) 짊어져야 한다고 하면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지은 죄가 나로 그치지 않고 내 자녀까지 이어지게 된다면 우리는 살아갈 힘이 없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내게 벌어지는 일이 내 죄에 대한 인과응보라 어쩔 수 없다고 하지 않는다. 그 일들을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이것을 확실하게 믿으면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담대할 수 있다. 좀 더 자신 있고 감격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 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결과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기에 어려움 속에서 기대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늘 잘못된 선택으로 불속에 뛰어든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건져낸다. 하지만, 다시 인간은 불구덩이로 뛰어든다. 그것을 하나님이 다시 건지신다. 이것이 구약 역사 내내 벌어지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챗바퀴처럼 벌어지는 반복된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예수를 구원자로 보내신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 구원자마저 죽여 버린다. 그게 인간이다. 끝까지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향하여 뛰어간다. 그의 죽음은 우리가 요구한 것이요. 우리의 선택이요. 우리가 만든 결과이다.

그것으로 끝이 났는가? 아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반전이 있다. 우리의 실수로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셨다. 그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실수와 실패가 결코 이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로 확인시켜 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어떤 윤리적인 고결함, 다함없는 선행으로 열매 맺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져서 빚어가는 인생이라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다.

2. 사사 에훗

에훗은 그를 평가할 때에 조금은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지만 구원하는 과정이 거짓을 동원한 ‘암살’이라는 방법으로 모압 왕 에글론을 죽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사들에 비하면 조금 비열해 보인다. 이 모습이 단순하게 이 날을 위하여 오랫동안 기획하고 만들어낸 앞서가는 전략가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모든 세상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괜찮다고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한 방법이 정당하지 않을 때에, 때로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니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이 하나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시고 행하라 하신 모든 것은 이해가 되고 납득이 돼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하자는 것이다. 살인이 죄이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옳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의이고, 명령이기에 순종하자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 아니면 구원이 없다’는 것을 믿는 이유가 성경을 읽어 보니 논리와 상식과 이론으로 납득이 돼서가 아니다. 단순하게 성경에 예수님 아니면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고 써 있기 때문이다(요14:6). 성경은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증거’하는 책이다. 과학으로 증명되어지는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는 것이 낫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기에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의 삶의 결론은 항상 승리라는 것을 기억하자. 죽음이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 순종은 내가 가진 것을 드리는 싸움이 아니라 나를 드리는 싸움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알기에 그 상황을 묵묵히 이겨 내는 것. 거기에 우리의 자랑이 있다. 그 사실 앞에서 항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지고, 망하고 실패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승리를 만들어 내실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 인생의 모압은 무엇인가? 이전에 남겨 놓은 것으로 인하여 오늘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무엇인가?

3. 그 모압으로 인하여 내가 깨달은 교훈과 삶의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

4.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드리는 자인가? 아니면 나를 드리는 자인가?

5. 예수님 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가? 왜 믿는가? 아니라면, 왜 안 믿기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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