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의 죄가 만연하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 이로 인해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하셨다. 그 후 8년이 지나자 옷니엘이라는 사사가 일어나서 구산 리사다임을 내쫓고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평안히 다스렸다는 이야기가 사사 옷니엘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시험의 의미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고 말한다(1,4절). 성경의 시험은 3가지로 말할 수 있다. 1) 테스트(test), 2) 시련(trial), 3) 유혹(temptation)이다. 이 중에 ‘유혹’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국한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혹은 돈, 명예, 권력, 편의, 안정 등 하나님 없이 내가 무언가를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모든 것은 ‘유혹’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에게 이 ‘유혹의 방법’으로 우리를 시험하시기도 하신다.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유혹’이 이루어지는가? 하나님께서는 남겨두신 이방 민족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시험했다고 한다. 그것은 농사가 잘 되어 ‘풍요로운 땅의 소산을 누리는 것’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은 ‘광야의 신’이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광야의 땅과 달랐다. 이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즉,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고 폭풍우를 관장하는 ‘농경의 신’이 그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신은 바로 ‘바알이다. 그래서 그들이 이방 족속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그의 아내 아세라를 섬기는 자가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하나님의 시험에는 이런 영적인 유혹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유혹이 있을 때에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지, 시험인지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이 일을 통하여 내가 누리는 복이 말씀에 근거한 정당한 방법인가 둘째, 이 일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가 아니면 그 복의 통로가 된 사람을 의지하여 하나님 보다 우선하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면 안다.
만일 이 두 가지 경우에 비추어 봐서 말씀에 합당하지 않고, 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복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시험이다. 이들의 선택은 농경의 신을 통해 땅의 산물을 얻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버렸다. 이것은 분명히 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했는가? 그것은 그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인간은, 말로는 근사하게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라고 얘기하지만, 그것이 내 유익과 이권에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을 할 때에는 가차 없이 등을 돌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큰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와 인품과 사상의 고결함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틈만 나면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수 많은 이유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신실한 약속을 지켜 나가신다는 것이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십자가 복음의 핵심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다. 그 이유로 하나님도 그들을 버렸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에게 넘겨서 8년을 어려운 시절(trial)을 보내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시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한 구원자를 보내셨다(9). 그가 사사 옷니엘이며 이 옷니엘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2. 시험의 유익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신 이유를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들에게 순종을 가르치기 위함이다(2,4절)’라고 얘기한다. 이 전쟁은 여호수아 시대의 전쟁을 의미한다. 그 때의 모든 전쟁들의 특징은 그들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를 한 것이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는 무기를 들지 않았었고, 갈렙은 80의 나이에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다. 무엇을 말하는가? 결코 그들이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전쟁을 아는 세대의 유일한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순종은 뭔가를 해서 소원하는 복을 받기 위해서 하는 순종이 아니라, 순종이 복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냥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준 예가 여호수아가 아이성 전투를 할 때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전쟁을 하라는 싸인으로 단창으로 아이성을 가리키라고 명령을 한다.
그 명령대로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팔을 거두지 않는다. 왜 그런 일을 했는가? 그는 이전에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에 이스라엘의 군사 능력과 상관없이 모세가 하나님 앞에 항복의 뜻으로 두 팔을 들고 있었을 때에 승리를 했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전쟁은 당연히 승리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자연스럽게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쟁의 승리의 원인을 잘 알기에 자연스럽게 순종하는 자의 표본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의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놓여진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머물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할게 하실 것이다.
3. 전쟁의 승리는 무엇으로 가능한가?
오늘 본문에 등장한 사사 옷니엘은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사람이 아니다. 이전에 드빌이라는 지역을 점령한 사람이 옷니엘이다(수15장. 삿1:13). 갈렙의 조카이며 사위이다. 그러니까 이미 가나안 인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전쟁 용사이다. 그런데 왜 메소포타미아의 지배 아래 가만히 있다가 8년이 지난 후에 등장을 했는가? 그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그는 전쟁을 아는 세대의 사람이다. 전쟁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개입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10절)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기도 하고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기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세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했고, 한번 임한 영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영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들이다.
복음은 내가 의로운 삶을 살아내서 복을 받는 인생이라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갈2:21).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에 우리를 질책하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실패와 실수에도 상관없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고,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 그것이 성경의 약속이요. 우리에게 허락된 복음의 진수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하나님의 말씀 보다 사람을 의지한 적이 있었는가? 그것이 나의 신앙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3. 나는 전쟁을 아는 세대인가? 아니면 모르는 세대인가? 안다면 순종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4. 나 스스로 생각해도 하나님의 명령에 놀라울 만큼 순종한 기억이 있는가?
5. 나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인지하고 사는가? 그렇지 못하면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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