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의 대표적인 시대 상황, 그 시대를 표현하는 것을 한 문장으로 말하라고 하면 ‘왕이 없었기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삿17:6, 21:25)’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군가 이끌어주는 사람, 안내하고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기에 모든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될 수밖에 없는 암흑의 상황이 바로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상황이다. 이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신자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1. 시대적 배경
모세의 인도 아래 출애굽을 했던 이스라엘은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 탁월한 지도력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을 정복해갔다. 그 후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어지는 상황이 사사 시대이다. 사사기의 처음은 여호수아와 비슷하게 시작하기에 우리는 이런 기대를 갖게 된다. 그것은 여호수아 시대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직 남아 있는 이방 족속들을 완전히 정복하겠구나 하는 기대가 생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처음에 유다가 가나안 족속을 무찌르는 이야기가 나온 후로는 이미 정복한 모압, 미디안, 블레셋 족속에게 역정복 당한다. 심지어 사사인 삼손이 블레셋 족속에게 눈이 뽑히고 맷돌질하는 모욕을 당하거나 급기야 뒤로 가면 동족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오히려 사사기는 뒤로 갈수록 절망이다.
2. 사사기의 기록 목적
1) 인간의 본 모습의 폭로
사사기는 쉴 새 없이 반복되어지는 하나의 패턴이 있다. 그것은 1) ‘죄’를 짓는다 2) 이방인에게 ‘압제’를 당한다 3) 하나님께 ‘간구’한다 4)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5) 은혜를 ‘망각’한다 1) ‘죄’를 짓는다.
이러한 패턴이 반복한다. 사사가 12명이기에 이 패턴을 적어도 12번을 반복한다. 무슨 말인가? 우리의 본성은 죄를 향하여 달려가는 일이 너무나 쉽고, 빠르고, 자연스럽다는 것이고, 반면에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지속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한 시기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가나안 땅을 거의 완전히 정복했을 때이다. 군사적, 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것을 누리고 있던 때이다. 그들이 가난하고 굶주려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제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린다.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하여 조금도 만족함이 없는 모습, 그것이 인간의 본 모습이다. 그런 인간의 사악함을 폭로하는 책이 사사기이다.
2) 인간을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을 앞두고 어느 지파 사람이 올라가서 싸울까 하는 질문에 하나님은 ‘유다 지파가 올라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시므온 지파’와 함께 올라갑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못 미덥기 때문이다. 하나님 만으로는 안 되기에 누군가의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어서 베섹의 왕 아도니 베섹에게 가한 형벌(엄지 손가락, 엄지 발가락을 자름)을 보니까 이미 그들은 이방 문화에 젖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화’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고난과 아픔’을 그들로 경험케 한다. 이것은 징벌(punishment)가 아니라, 징계(discipline)이다. 징벌은 과거에 대한 ‘벌’이 목적이지만, 징계는 미래에 대한 ‘교정’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내린 고난에 대한 바른 해석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훈육’하기 위하여 ‘고난’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리기 위함
이 사사기 안에서 강력한 대조를 이루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 vs.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사사기가 그 수 많은 아픔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낙관적으로 바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이 당신의 백성에게 한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끊임없이 일 하시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패역한 인생길을 돌리기 위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권고하고, 회유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그 길의 끝은 사망인데 계속해서 달려간다. 즉, 사사기는 인간들의 행위와 노력으로는 결코 자신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방법을 바꾸셨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부패한 인간을 대신하여 내어 주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내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는가? 십자가는 유대의 형벌이 아니라 로마의 형벌이다. 그럼 왜 유대인의 율법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로마의 형벌을 따랐는가? 신명기에 보면 ‘죽을 죄를 범한 자는 죽여 나무에 달라(신21:22,23)’는 율법이 있다. 그러니까 ‘나무에 달아버린다’는 말의 의미는 도저히 인간 스스로 속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큰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최고의 형벌이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는 로마의 식민지 시대이다. 유대의 법으로 극한 형벌을 행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로마에 있는 극한 죄를 지은 사람을 처형하는 최고법이 있는데 그것은 ‘나무에 달아 죽이는 것’이다. 즉, 십자가 형벌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인간은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옆에서 끌어주고, 도와 주고, 지도를 해 주려 해도 이 고집스럽고 사악한 인간들은 자신을 구원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구해줘도 다시 죄의 불로 들어가는 그 굴레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무에 달아 죽이는 길’ 그것 밖에 없다. 인간의 힘으로 그 무거운 죄의 사슬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그 저주를 속량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갈3:13,14).
이제부터 사사기를 읽을 때에 이것을 봐야 한다.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과 그런 불안하고 바닥을 치는 인생 속에서 혼자 일하시는 분. 우리의 능과 힘으로 안 되기에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그 약속을 변함없이 이루어 내시는 분. 그 하나님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완성될 현실로 그 약속을 이루어 내실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잘 보여주는 책이 ‘사사기’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 인생에 있어서 희망이라는 기다림이 가장 길었던 때는 언제인가?
3.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나를 다루시는(treat) 방법이 있는가? 나를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교훈하시는가?
4. 교회가 세속화가 되어가는 것을 아파한 적이 있는가? 어떤 점이었고,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5.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 vs.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간증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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