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는 분이신가? 아니면, 시험치 않으시는 분이신가? 성경에는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약1:13)’는 말과 ‘자신의 백성을 시험하신다(창22:1,출15:25)’는 두 가지 상반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모순된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성경에는 시험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싸’와 헬라어 ‘페이라조’가 있다. 이 단어는 크게 3가지의 의미로 사용이 되다.
1. 테스트(test)
이것은 현재 내 신앙의 수준이 어디까지 와 있는가를 깨닫고, 신앙 수준의 도약을 위한 디딤대로 삼는 일을 말한다. 신자의 삶이란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내게 공급해 주시는 나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대한 감사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그 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나를 사용하는 단계까지 올라가야 한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때때로 자신의 백성을 시험하시며, 이를 통하여 신자는 자신의 신앙이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를 한 후에, 배운 것을 확실히 잘 알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보는 시험(test)과 같은 뜻이다. 중요한 것은 이 시험은 떨어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이 시험을 통하여 응시자가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일가를 깨닫게 되고, 내 실력이 잘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큰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는 시험은 어렵게 해서 우리를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뜨리기 위하여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 받은 신자의 삶에 부족한 부분을 채우게 되고 성장을 하게 된다. 이 시험은 신앙의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만일 실패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얼마 후에 비슷한 종류의 시험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결국에는 그 과정을 통과하게 하신다.
2. 시련(trial)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연단(!)하는 차원에서 시도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라고 가르치셨는데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당하거든 기쁘게 여기라(약1:2)’고 얘기한다. 심지어 이 두 곳에 나온 시험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페이라조’로 같은 단어이다. 왜 같은 단어인데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이 단어가 갖는 특징 때문이다. 이 단어는 주체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다르게 사용된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시험’은 ‘시련(trial)’이라는 뜻이다(약1:3). 그러니까 우리가 기쁘게 여겨야 할 시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시련’일 경우에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응하라는 뜻이다. 왜 기쁘게 여겨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시험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고, 성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신앙의 모든 사람은 이 과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적인 젖먹이 과정을 통과하면 반드시 이 일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다. 그리고는 그들을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광야로 데리고 간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시험(시련)이다. 이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을 사는 동안 입을 것, 마실 것, 먹을 것 등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있음을 알게 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 갈 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우리가 편하고 모든 것이 잘 풀리면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연단의 시간을 허락하신다. 시련은 아프다. 힘들다. 하지만, 이 과정을 겪어야만 우리의 신앙이 단단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 사도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고 말씀하신 것이다.
3. 유혹(temptation)
시험이라는 뜻의 ‘페이라조’는 주체가 달라지면 완전히 다른 뜻이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면 ‘테스트 혹은 시련’이지만, 사탄으로부터 오면 완전히 다른 뜻이 된다. 그것은 ‘유혹(temptation)’이라는 뜻이다. 이 뜻이 바로 주기도문에서 말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라는 뜻이고, 야고보사도가 말한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약1:3)’라는 뜻이다. 그 대표적 예로는 예수님이 사탄에게 받은 시험을 의미한다(마태복음 4장)
이것은 마귀가 인간을 넘어뜨리려고 시도하는 시험이고,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면서 죄악에 빠지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원어에 보면, 이 기도에 ‘시적 대구(parallelism)’가 있다. ‘들게 마옵시고’와 ‘구하시옵소서’가 그것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이런 뜻이다. “우리를 유혹으로 끌어들이지 마시고, 오히려 악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내 주소서”이다.
이 문장으로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유혹의 자리에 끌어들이는 개연성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접 유혹하는 일은 없지만, 유혹의 자리에 인도하는 일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그 자리로 인도하던 주체가 ‘성령’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다(마4:1)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에 당연히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이겼으니 나도 말씀으로 무장하면 마땅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이길 것이라고 꿈도 꾸지 말고, 아예 그 근처에 가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우리를 유혹의 자리에 끌어들이지도 마시고, 나도 모르게 끌려가 있다면 반드시 거기서 끌어내 주세요’이다.
특별히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을 때가 40일을 주린 후이다. 즉, 영적으로 가장 깨끗하고 청렴할 때이다. 우리 역시 영적으로 가장 민감하고, 충만할 때에 조심해야 한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에게 조금의 빈틈이 보이면 치고 들어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벧전 5:8). ‘말씀으로 무장하며 남을 정죄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고, 율법주의가 되어 ‘행위로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자.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온전히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자.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의 간절한 청원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수준이 있는 신앙인인 줄 알았는데 내 밑바닥이 드러난 사건이 있는가? 그 때 받은 느낌은?
3. 내 인생에 가장 힘든 시련의 시기는 언제인가? 그 일을 통하여 난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잃은 것, 얻은 것)
4. 나는 어떤 유혹에 약한가? 이것을 이기는 나만의 비책이 있다면 무엇인가?
5. 내가 악한 것에서 끊거나 나온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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