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는 자녀의 양식을 구하지 않아도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두 가지의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양식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지 않는 아버지는 아버지라 불릴 자격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하지 않아도 채워주면 굳이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매일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을까?
1.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신 것의 의미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라는 가르침에는 또 다른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바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기도는 이방인이 하는 기도이기에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마6:31,32). 하늘의 아버지는 미리 우리의 필요를 아시기에 그것은 믿음이 작은 자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앞서 주기도문에서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과 완전히 배치되는 말이다. 그럼, 왜 이런 모순된 가르침을 하고 계신 것인가?
이것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이 정확히 구약에서 가지고 온 말이다. 출애굽 당시에 신광야에 도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먹던 떡을 그리워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이 바로 ‘일용할 양식’을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주겠다는 것이었다(출16:4). 그것은 바로 ‘만나’이다. 만나는 딱 하루가 지나면 먹을 수 없었던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이었다.
왜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만을 허락하셨나? 그것은 이릍 통하여 오로지 전적으로 하나님 만을 의지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신8:3).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죽을 것 같은 어려움을 만나면, 그것은 오늘의 떡의 유무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신다는 그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는 자만이 현재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물질적인 필요를 넘어선 ‘내 인생은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하나님을 향한 항복의 선언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인생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가 드리는 신앙의 고백으로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내 인생이 홀로 버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 일용할 양식의 영적인 의미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의 기원은 출애굽 시대의 ‘만나’를 의미한다. 이 만나가 영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요한복음 6장에 등장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정확히 출애굽 시대에 있었던 만나 사건의 재현이다. 만나가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와 백성의 양식이 되었고, 오병이어도 광야에서 하늘의 기적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린 배를 채웠다. 그 때 예수님은 본인을 ‘하늘의 떡’으로 비유하며 ‘이 떡을 먹는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6:58). 즉, 예수님의 가르치신 ‘일용할 양식’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양식이 곧 ‘예수’이다.
우리 신자들의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구해야 하는 양식은 이런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찾고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다. 그러한 이유로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는 ‘일용할 양식’인 예수를 구하라고 하시고, 바로 이어서 육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무엇을 먹고, 마실 것인가’에 대한 기도는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오늘 날 우리 기독교 신양을 가진 사람들이 고작 내 육신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산다면 그것은 정말 가난한 신앙을 가진 것이다. 내 육신의 필요에만 머무르면 안 된다. 우리는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구해야 한다(요6:35).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일용할 양식’인 예수를 구하는 기도가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 가득 채워질 때에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삶의 의미와 만족을 찾을 수 있다.
3. 우리의 궁극적인 기도
이제 우리가 이방인처럼 내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구체적으로 내 삶 속에 무엇을 구하여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마6:33). 이것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올려드려야 하는 기도의 최선이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육신적인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은 내 기도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나의 육신의 필요와 간구는 차선으로 해도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내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약속이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우선으로 기도하는가는 나의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말한다.
나의 필요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다른 방법이 없다.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나의 삶 속에서 무수한 일들 가운데 그분의 일하심을 경험을 해야 한다. 그래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 기도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를 위한 기도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기도가 필요하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장 합리적이고, 최적화된 복음 전도의 도구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이고, 우리는 그의 몸이다(엡1:22,23). 그것이 교회이다.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신 말씀의 실현이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로, 그분의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될 줄로 믿는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일용할 양식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벼랑 끝에서 살아난 경험을 나누어 보라)
3. 내 삶에 예수 한분이면 정말 만족하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4.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만 하고 내 개인적인 기도를 하지 않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5. 내 삶의 방향, 가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을 통하여 내 삶 속에 어떤 것이 구현이 되는가?
6. 지금까지 내 ‘개인적인 필요’를 위한 기도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기도의 비율이 어느 정도되는가?
7. 지금 교회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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