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화평은 내 노력과 힘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의 화평이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의미한다. 팔복의 ‘화평하게 한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이레노 포이오스’라는 말이다. 골로새서의 ‘화평을 이루사’(골 1:20)와 같은 단어이다.
여기서 바울은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헬라어의 ‘화목’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아포카탈랏소’가 그렇다. 그러나 바울은 굳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에이레노 포이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그 화평의 대상은 누구인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곳에 앉아 있던 제자들은 분명히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즉 로마와 이스라엘 사이에 놓여있는 국가적 혼돈을 해결해 줄 분이 예수님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화평은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게 벌어지는 물리적인 것, 혹은 상황이 해결된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적으로 선포되는 모든 평화는 다 피상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다.(렘 6:14) 우리에게는 현재 내게 주어진 상황이나 형편과 상관없는 본질적인 평화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평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며 그 근본은 무엇인가.
그 평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시는 것에서 시작한다. 성경은 그분이 ‘평강의 왕’이라고 말한다.(사 9:6) 그 말의 의미는 그분 자체가 평강이고 평강을 주관하는 근본이라는 것이다. 더 재밌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평강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실 것인데 우리의 노력과 수고와 공로가 아닌, ‘여호와의 열심’이 그 일을 이룰 것이라고 한다.(사 9:7)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한 그 평화가 실현된 장소는 어디인가. 바로 십자가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죄의 문제가 해결됐다. 이로 인해 하늘로부터 시작된 평화가 우리에게 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었다’는 말은 ‘인간과 인간 사이’ 혹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평화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예수의 보혈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고, 그 본질적 평화가 우리에게 임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팔복을 통해 하신 약속의 실현이다.
팔복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 즉 복을 받은 자들을 향한 ‘선언’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9절을 직역하면 “복되도다. 화평하게(!) 하는 자여.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가 된다.
이 말은 이미 화평하게 된 신자들은 불신자들을 ‘화평하게 하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얘기이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화평하게 된 이들은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일’에 부름을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고후 5:18~19)
그렇기에 우리가 이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스스로 ‘나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화평하게 된 자’라는 인식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 사실을 놓치면 우리는 가난한 신앙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복을 얻은 자이며, 앞으로 준비된 복들이 삶 속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팔복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핵심 선포이다.
이수용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목사
(아래를 클릭하면 국민일보 원본 게시물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42895&code=23111515&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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