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나온 온유의 정의는 ‘성격,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는 이러한 성품을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인가.
성경에는 온유한 자로 묘사된 두 인물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과 모세이다. 과연 이 두 사람이 온유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성전에서 상을 뒤엎은 적이 있고, 바리새인들에게는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심한 욕도 거침없이 하셨다.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는 모세의 경우는 어떠한가. 모세는 젊은 시절 히브리인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살인한 적이 있다. 반석에 ‘명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반석을 지팡이로 ‘때려서’ 물을 내었다. 그는 이것 때문에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다. 자기 성질을 못 이긴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손수 쓰신 십계명을 금송아지를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던져서 깨뜨렸던 사람이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봤을 때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길들임’이다. 팔복에 쓰인 온유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프라우스’이다. 이 말의 본뜻은 ‘사나운 짐승을 훈련하여 주인이 사용하고자 하는 용도에 맞게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거친 야생마를 길들여서 명마로 만든다는 의미이다.
모세는 성격이 불같았다. 항상 자기의 성질을 제어하지 못해서 문제가 발생했다.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보냈다. 그곳에서 40년의 고행을 통해 그를 길들였다. 그 후 그를 이스라엘 백성 수백만명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위인으로 만들어 내셨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울 역시 온화하지 않았다. 자기의 멘토인 바나바를 무시했으며, 수석 제자인 베드로에게 화를 내고,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도 선교 여행에 적합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할 만큼 매정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서 목적에 맞게 길들여졌을 때 하나님이 그를 들어 사용하셨다. 그것이 온유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그것은 길들여졌다는 것이 ‘순한 양’이 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 기질과 성격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급한 성격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감정대로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최적화된 상태가 되었다. 그것은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향하여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온유의 두 번째 뜻은 ‘겸손’이다. 이 ‘프라우스’라는 단어가 성경에 ‘온유’ 이외에 다른 말로 번역되었다. 그것은 ‘겸손’이다.(마 21:5) 히브리 말로는 ‘아나브’인데 이 말은 ‘낮아진, 가난한, 억압받는, 짓눌린, 애통한’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은 ‘온유하다’는 말을 들으면 환경적인 어려움을 통해서 낮은 마음을 가진 겸손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한 이유로 당시 식민지 백성으로 고통받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이 있도다. 온유한 너희여’라는 말에 큰 감동을 받은 것이다. 마치 자신들이 겪고 있는, 억압받고 짓눌린 마음을 예수님이 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복음은 어느 순간 어느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만지고 계심을 아는 것이다. 내 인생의 해결은 내 손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 있다. 그것을 믿는 자가 현재의 상황 속에서 내가 가진 복을 노래할 수 있다.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국민일보 원본의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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