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 여섯 번째 시간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에 대하여 살펴보자.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긍휼의 의미는 무엇인가?
1. 긍휼의 의미
1) 통감하다 :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인성이라는 마을에 가셨을 때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장사지내는 과부가 등장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안고 있을 그녀를 향해 예수님은 불쌍히(his heart went out to her) 여기셨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녀에게로 가서 그녀의 아픔을 통감했다는 것이다. 똑같이 느끼고 괴로워하셨다. 이것이 성경의 ‘긍휼’이다.
2) 창자가 끊어지다 :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은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생각을 한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마음이 ‘창자’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의 아픔을 ‘불쌍히 여기사’라고 하셨는데, 이 단어의 원어 뜻은 ‘창자가 꼬이다’라는 말이다. 창자가 꼬일 듯이 아파하고 괴로운 마음. 이것이 성경의 ‘긍휼’이다.
2.누가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을 수 있는가?
팔복에 나오는 ‘긍휼’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엘레에오’이다. 이 단어가 사용된 성경의 장면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긍휼이 누구에게 쏟아 부어지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 ‘엘레에오’는 마태복음 9장에 나온 예수님이 두 맹인을 고치신 일과, 15장에 가나안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치신 이야기에 등장을 한다. 이 두 경우 다, 이들 모두가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가 팔복의 ‘긍휼’과 같은 단어인 ‘엘레에오’이다. 그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이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1) 자가 치료가 불가능한 자 : 이들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는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맹인도, 귀신들린 자도 누군가 도와 줘야지 자기의 능력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사람들이었다.
2) 자격 없는 자 : 이 두 맹인과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에게 자기의 필요를 요구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자들이다. 제자들처럼 직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좇은 적도 없고, 재산을 팔아서 헌금한 적도, 예수님의 시중을 들은 적도 없다. 더구나 가나안 여인은 당시에 유대인이 상종을 하지 않던 이방인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밑도 끝도 없이 일면식도 없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소리친다. 이 두 경우다 하나님 앞에서 긍휼을 입을 수 있는 자격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으로부터 긍휼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3) 믿음이 있는 자 : 그들의 믿음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두 경우 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마9:29, 15:28). 아무 능력도, 자격도 없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들이 가진 ‘믿음’ 때문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서 자꾸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내게 주어진 결과에 대한 원인을 항상 나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내가 사랑 받는 것에 대한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기에 우리는 자꾸 하나님께 뭘 해서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받을 수 있는 원인은,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얘기한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온다. 유대인으로부터 천대 받던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데, 그 때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의 ‘불쌍히 여겨’라는 단어가 바로 ‘창자가 끊어지다’라는 헬라어이다. 강도 만난 자는 사마리아인에게 무언가를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살려달라는 요청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불쌍히 여겨’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치료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었던 그 때에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사 죽기까지 당신의 사랑을 보이신 것(롬5:8).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3. 팔복의 적용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팔복에서 말하는 긍휼은 누군가를 향하여 갖는 안타까운 마음, 애타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긍휼의 복은, ‘남을 불쌍하게 여겨서 도와주는 사람은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 절대로, 절대로 아니다.
팔복의 긍휼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석되어지는 ‘긍휼’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인 선택을 받아서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쏟아 부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이 팔복이 말하는 긍휼이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중에도 남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오지에 들어가 남을 긍휼히 여기며 희생을 하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많다. 이것은 모든 종교인들이 다 하는 행위이다. 만일 그런 긍휼을 복의 기준 삼으면 자기 의로 남을 도와 준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하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 나의 의와 희생으로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한량없는 십자가의 긍휼을 타인에게 흘려보내는 사람이다. 내 의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일을 행하는 자는 계속된 그리스도의 긍휼을 삶 속에서 공급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요’라는 말이다. 나의 의지와 수고로 남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어 복 받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복음으로 살 수 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 사랑의 마음은 주체(subject)의 문제이지, 대상(object)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의 상태와 조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주체인 내가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다. 사랑은 내 마음이 가는 곳으로 흐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도 똑같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사랑은 인간들 스스로가 내리는 객관적 평가에 있지 않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관적인 평가에 의해서 사랑과 긍휼을 입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인격과 성품에 상관없이 무조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걱정하시고, 아파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이다. 이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오늘 임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본 적이 있거나, 지금 그러한 사람이 있는가?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3. 하나님이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가? 언제 그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는가?
4. 내가 생각하는 긍휼과 성경이 말하는 긍휼의 확실한 차이를 스스로의 언어로 말해 보라
5. 내가 나를 평가하면, 하나님이 어떤 부분을 사랑할 것 같고, 반대로 어떤 부분을 질책할 것 같은가?
6. 사랑의 마음은 주체의 문제이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 경우는 어느 경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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