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팔복에 대한 바른 이해를 살펴보자.
1. 팔복의 핵심적 특징 : 조건이 아닌 선언
이 팔복은 예수님이 신자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하신 ‘복의 선언’이다. 많은 경우에 팔복을 조건, 혹은 명령으로 이해한다. 즉,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지 만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져서 내 안을 비우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무엇을 보던지 애통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것이며, 온유한 자가 되어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사실은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원어의 의미는 정반대이다. 오히려 예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띠우며 “너희는 이미 복을 받은자”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마카리오이’가 사실은 형용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신자가 이렇게 살면 장차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원’의 의미가 아니라 이미 현재 너희는 복을 받은 자라는 선언이다.
영어 성경도 “Blessed are...”로 복을 받은 자임이 먼저 나오고 상태도 현재형이다. 이 말은, ‘앞으로 너희가 이런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너희의 상태가 이미 복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팔복은 신자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 강령’ 혹은 ‘조건’이나 ‘명령’이 아니라, 현재 신자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beautiful 이라고 말을 시작하면, 그것은 그 사람이 예쁘다는 감탄의 뜻이 듯이, 예수님이 팔복의 문을 열며 형용사인 ‘마카리오이’라고 한 것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을 바라 보며 ‘복 받은 자여, 복이 있도다, 복 스럽구나~’하고 감탄하는 말이다.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팔복을 번역하면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여...’이다. 이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와 완전히 다른 느낌의 문장이다.
그렇다. 팔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며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해서 우리에게 표현하고 있는 감탄사이다.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 모두를 끌어안으시며 ‘너희는 이미 복을 받은자’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성경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동일한 사상이다. 에베소서 1장에서도 이미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 신령한 복을 이미 주셨다고 얘기한다(엡1:3,4)
이 선언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위로를 주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로마의 식민지 백성이었던 그들은 이미 가난하고, 이미 애통하며, 이미 하나님의 의에 주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 마음 깊숙한 곳의 아픔으로 신음하며 아파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첫 선언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아, 애통하는 자들아,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복을 받은 자들인 것을 아느냐’라고 깜짝 놀랄 선언을 하고 있기에 그들은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팔복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키는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눈이다. 이 팔복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라든가, 공덕과는 다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복이 조건이기 때문에 반드시 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과 수양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팔복이 훨씬더 소중한 이유는 이 팔복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어 마음과 영혼이 피폐해진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복되다 하시며, 새로운 삶의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강력히 표현되어 있기에 다른 종교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감동과 감격을 누릴 수 있는 것. 이것이 팔복이다.
2.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의 의미 : 영적인 파산 상태
본문에 ‘가난한 자’로 번역된 헬라어 ‘프토코스’라는 말은 ‘극빈자, 산산이 부서진 자’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 신자 모두는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의 의미는 물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과 영혼이 산산이 부서져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며 의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가진 것은 죄 밖에 없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로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임을 확실히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왜 성경이 이러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가? 그것은 여기까지 가야지 내 영혼 밑바닥으로부터 예수가 필요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으로 결코 이룰 수 없기에 예수를 바라보는 마음.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다.
이것을 현재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내가 복 받은 자임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방법은 ‘심령이 가난해 질 때’이다. 그 상태가 되어야 내가 현재 받은 복을 누리는 자로 살 수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그 상태로 이끌고 가실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만이 주신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3.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 : 이 땅에서 천국을 소유한 자의 삶
팔복 중에 두 가지의 복은 현재형으로 쓰여져 있는데 그것은 ‘천국’에 관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내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이 내게 있다는 것은 이 땅의 삶이 ‘하나님의 통치권’아래 있음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 믿음이 있는 자는 하늘이 무저질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어려운 상황은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는 것이기에 결국에는 반드시 나의 유익을 위하여 쓰여질 것을 당연하게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가 지금 소유한 복을 타인에게 나눌 수 있다.
내가 지금 현재 위치에서 가진 자로써의 삶을 살지 않으면 어쩌면 우리에게 평생 그날은 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가진 자로써의 복된 삶을 살고 나누면 평생을 행복하고 여유 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천국을 소유한 자의 비밀이다.
오늘의 이 무너진 가슴과 아픈 현실로 인해 절망하지 말자.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놓인 지금의 현실을 안다는 것과 그 상황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의 이 어려운 상황을 두신 이유는, 우리에게 ‘가난한 심령’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져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복을 누리는(!) 자로 살 수 있게 될 것임을 기억하고, 오늘의 삶 속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팔복을 ‘조건’으로 알았을 때와 ‘선언’으로 알았을 때의 느낌의 차이를 말해 보라
3. 내가 이해한 세상 종교의 ‘무소유’ ‘공덕’의 사상과 기독교의 ‘복음’의 차이는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4. 내가 평소에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하는 고백은 ‘영적 파산’의 의미인가, 아니면 단순한 ‘읊조림’인가
5.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타인과 내 것을 나누었던 일이 있었는가?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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