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버드대 교수인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정의를 3가지 방식으로 말 하였다. 그것은, ‘행복’, ‘자유’ 그리고 ‘미덕과 좋은 삶’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가치들을 반영할 수 있는, 공정한 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이 말은 마이클 샌델 교수도 정확한 정의에 대한 정의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예수님이 말하는 의(justice)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의 의가 바로 정의가 되어야 우리에게 주신 복을 바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1. 세상의 의
전문가의 시각이 아닌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단순한 정의는 대략 3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공리주의, 도덕적 기준 그리고 선한 양심의 기준이다. 보기에는 너무나 일리가 있고 타당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불행을 무시할 수 없으며, 문화, 정치, 나라마다 도덕의 정의가 다르고, 인간의 양심으로 정의를 기준하는 것은 위험한 모험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상의 의는 무엇인가?
결국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뭐가 옳은지 모르겠다는 것이 세상이 갖고 있는 의이다.
2. 하나님 관점에서 보는 인간의 의
하나님은 인간을 보시며 우리가 가진 의를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얘기한다.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으며 아무리 우리가 선한 행동을 보였을지라도 하나님을 그것을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의로워서 의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를 잘 감추고 있기에 남에게 의로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일대일로 정직하게 대면하여 보면, 단 한 사람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하신 대상은 당신의 로마의 식민지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이었다. 이것이 팔복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key)이다. 그들에게는 남아 있는 의가 없었고, 또한 제공 되어지는 의가 하나도 없었다. 늘 손해보고, 억울하고, 빼앗기고, 답답한 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그들은 이런 억울함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누군가 이 부당함을 풀어주기를 사무치게 기다렸다. 심지어 오늘 본문의 ‘주리고’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라고 말할 때 쓰인 단어 ‘페이나오’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의가 완전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복이있도다’라고 선언하셨다.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그들은 자신들에게 남아 있지 않은 ‘의’의 부당함으로 인하여 메시야를 사무치게 기다리게 되었다. 구원자를 기다렸다. 왜 그런가? 그들이 처한 상황이 ‘의에 주리고 목 말랐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우리의 상황이 어렵고, 힘들고 고통 가운데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축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상황을 통해 구원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참 복은 모든 것을 다 갖고 있고,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것에 있지 않다. 세상의 의를 통해서는 우리는 결코 만족을 누릴 수 없고, 배부를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의’는 단 하나를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다고 얘기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의롭게 하신다’는 그 단순한 믿음이 곧, 하나님의 의를 값없이 이룰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고 얘기한다(롬3:21~24).
이전에는 죄사함 받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드리는 ‘제사’로 만이 죄 씻음이 가능했다. 그 날을 통해 지난 1년의 죄를 씻음 받고 깨끗함(의인)을 입을 수 있었다. 이 제사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제사장의 생존 여부이다. 대제사장이 백성의 모든 죄를 염소에게 안수하여 전가한 후에, 그 염소를 죽인다. 그리고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언약궤에 피를 뿌려 죄사함을 하나님께 구한다. 그 때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대제사장이 죽임을 당하고, 용서함 받으면 살아서 나온다.
그렇기에 제사의 가장 중요한 것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오는 것이다. 이 얘기를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그대로 가지고 와서 설명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제사장의 자격으로써 하나님 앞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는 다른 짐승의 피가 아닌 자기의 피로 들어갔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끝이었다면, 이것은 율법에 의하면 죄가 용서 받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통해 백성의 죄를 용서 받았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나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다시 사셨고, 그것이 ‘부활’이다.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자체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뜻이기에 아무리 십자가가 있어도 부활이 없으면 율법을 완성시킬 수 없다. 이를 위하여,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그는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고전15:17, 롬4:25)
이제 다시 팔복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은 이미 주어졌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사함 받기를 사무치게 원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갈급함이 절대 굶주림으로 느끼어 그분으로 채우기를 원하는 믿음을 가진 자이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당시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제자들 뿐 만이 아니었다. 그 시대를 겪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참 의가 이 땅에 왔는데 유대인들이 못 알아 봤다. 왜 일까? 그들이 생각하는 의(세상의 의)와 하나님이 생각하는 의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정의인지 모르는 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가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에 대하여 목마른 자가 궁극적으로 도달 할 수 있는 진리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무엇인가? 스스로 갖고 있는 정의를 정의해 보라
3. 내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이었다면, 예수를 믿었을 것 같은가? 안 믿었을 것 같은가? 이유는 무엇인가?
4.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추상적인 것 말고 현실적인 대답을 말해보라.
5. 내가 지은 죄로 인해 괴로워한 적이 있는가?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나눌 수 있는 선에서 나누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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